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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조계종 관음사 원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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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1-08 15:38 조회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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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심비불(非心非佛)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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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추구하는 목표는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절대성을 발견하 고 깨닫는 데 있다. 그렇다고 단순한 탐구만으로 깨달음이 이루어 는 않는다. 고요와 명상이 있어야 한다. 사유와 명상이 빠져 있는 은 거칠고 건조하여 자비의 물기가 없다. 그리고 분별 없는 지혜로 물을 대해야 한다. 얼굴을 돌리고 말았던 아무리 미운 상대라도 마음 속에 차별이 없고 가슴을 데워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랑이 있게 되면 이웃같이 한결 가까이 느껴진다. 그래서 안목이 필요하다. 누구나 눈 앞에 사물을 보고 있으나 이것을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의 숨결을 들을 수 있는 지혜의 안목으로 볼 때 일초일목이 자신과 하나의 생명 체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절대적 진리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 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선은 일상 생활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고 평상심을 떠나서는 이룰 수 없다. 다만 일상을 통해서 우리가 모든 존재에 구애되고 우리들 마음이 고통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마음에 무명이 깊어서다.

삼독(三毒)이란 어둠을 뜻한다. 인간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본능은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다. 이것은 탐욕이며 탐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킨다. 분노는 자신을 불꽃 속으로 몰아넣고 마음과 육신을 병들게 한다. 그러나 자 신을 병들게 하는 원인을 추적하고 탐구해 보면 그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번 자연 속에서 우주 질서를 살펴보자. 흙과 나무와 물로 이루어 진 자연은 거짓이 없고 추구함이 없다. 자연 안에서는 그래서 아무 쇄 신(刷)이 필요치 않다. 본래 갖추어진 그대로 넉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로 마음을 비워 자연 가까이 가면 거기에는 진실의 응답 이 있다. 고통이란 구하고 탐구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온갖 고 뇌는 집착에서 생기고 진정한 기쁨은 집착을 놓아 버린 데 있다. 방하 착(放下着)이란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을 놓아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 있는 집착을 일순간에 제거해 버리라는 뜻이다. 집착의 군살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영적 섬광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 명과 결탁해 있는 자신을 해부하고 피투성이처럼 낭자한 번뇌를 제거 하겠다는 결의가 있을 때만이 자성과 결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혼 돈이 있는 골목까지 자신을 몰고 갈 때 모든 사물과 화해해 있는 자아 를 발견할 수 있다.

선은 시간을 통해서 자성에 도달하는 것을 거부한다. 어둠이 있는 자기 내부에 영적 충격과 섬광을 불어넣어 직관으로 자성을 깨닫기를 강조한다. 선은 인간 지성(知性)안의 가상적 실재를 파괴하고 본체를 체험하기 위해 언어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반어(反)를 사용하 기도 한다. 그리고 화두(話頭)는 삶의 중심 사실을 파악하는 데 있어 수단에 불과하며 우리의 존재와 자유의 기초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깨달음에 있어 돈오(頓悟)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최고의 정신적 자질을 갖고 있는 자에게만이 적용되기 때문에 점수(漸修)의 지루함 을 거부한다. 따지고 보면 선에 있어서 점수는 권태에 속한다. 본래 갖추어 있는 것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없다. 일초 직입여래지(超直入如來地)하는 섬광이 필요할 뿐이다.

여기서 마조도일 선사의 일화 한 토막을 보자. 어느 날 마조가 좌선 을 하고 있을 때 회양은 거울을 만들겠다며 기와를 갈았다. 마조가 이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자 회양은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소를 때려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를 묻는다. 기와를 갈아 서는 거울을 만들 수 없듯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좌선이라고 할 수 없고 부처님은 좌불(坐佛)이 아님을 철저히 인식시킨다.

"앉아서 명상하며 그대는 좌선을 배우고자 하는가. 또는 앉아 있는 부처를 흉내내고자 하는가. 앞의 경우라면 선은 안고 눕는 데 달린 것 이 아니요, 뒤의 경우라면 부처는 일정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 다. 법은 영원한 것이기에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 는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만 집착한다거나 그 어떤 특정한 면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앉아서 성불코자 하는 것은 부처를 죽이는 일이다. 좌상(坐像)에 집착해서는 근본원리를 파악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마조는 이러한 회양의 선종 정신을 긍정하면서 앉아 있는 것이 참 선이라고 주장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 은 위대했다. 오히려 혜능의 사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립하고 견성의 의미를 즉심즉불(卽心卽佛)로 체계화했다. 마조는 혜능처럼 견성을 주장하지 않았고 마음이 곧 부처라는 새로운 인식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위대성은 설법에 있다기보다 교육자로서 그의 놀라 운 재주와 기지에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날 그의 제자인 대매(梅)가 찾아와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마조가 마음이 부처라고 말했다. 그러나 훗날 마조는 다시 비심비불(心非佛)로 교육 방법을 바꾸었는데 이때 대매는 스 승을 비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 늙은 영감이 언제나 사람을 당혹케 하는 것을 중지하려나? 비 록 스승이 비심비불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즉심즉불을 고수하겠다.” 대매의 주장을 보더라도 마조의 즉심즉불 사상이 얼마나 보편화되 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마조가 말한 즉심즉불만큼 선종 의 진리를 잘 표현한 말도 없다. 비록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말이지만 심외무불(心外無佛)을 인식시키는 데 있어 이만큼 효과적인 발언도 없다. 마음속에서 여래를 찾고 자기를 여래로 인격화하는 일은 즉심즉불을 체험하는 일뿐이다. 그러나 마조는 끝까지 즉심즉불을 고 집한 것은 아니다.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는 비심비불이라고 역설적 방 법을 동원했다가 정신적 자질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몸짓을 통해 격 렬한 교육 방법을 사용했다. 특히 마조의 제자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 려진 백장에게는 폭력에 가까운 자극을 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날 마조와 백장은 함께 길을 걸었다. 이때 두 사람은 들오리 한 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마조가 능청스럽게 무엇이냐고 물었 다. 일상 속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통해 내적 자아를 발견하 게 하려는 마조의 돈오적 질문이었다. 백장은 본 그대로 '들오리'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마조는 "들오리가 어디로 갔느냐"고 추궁했다. 그 의 질문은 이미 계획된 것이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마조는 "날아가 버렸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마조는 백장의 코를 잡고 힘차게 비틀 어 버렸다. 코 밑이 무너지는 아픔이 엄습하였다. 백장은 비명을 지르 며 스승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마조의 지극한 애정을 깨닫지 못했 다. 마조는 "날아가 버렸다고 또 그렇게 말하겠는가?" 하고 추궁하였 다. 이때 백장은 본질의 문을 열고, 들오리의 무리가 날아가 버린 것 이 아니라 우주 속에 항상 자아가 충만해 있음을 깨닫을 수 있었다. 백장이 이러한 사건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내적 훈련이 되어 있었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잘못된 신념과 가치에서 자유스러워져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독선적 신념은 인간을 속박하고 고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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