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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조계종 정음선원장 정음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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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6-29 12:49 조회2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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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있는 모든 부모의 마음은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는다”

사단법인 한국불교조계종 정음선원장 정음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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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최대 목적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있다.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생육취에 윤회하고 있는 불쌍한 중생들로 하여 금 하루속히 불보살의 바른 법을 일러 주어 스스로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데 근 본정신이 있다. 이 얼마나 거룩한 대자대비이며 이타겸선(利他兼善)의 원만무결한 정신이냐. 남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데 참 기쁨이 있으며 어두 운 곳을 환히 밝혀 주는 거기에 진정한 즐거움이 있다.

비근한 예이지만 배가 몹시 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주어보라. 그 밥 한 그릇으로 허기가 면해지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기쁨을 느끼겠으며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겠는가? 병이 들어 누운 사람에게 약 한 첩을 먹여 보라. 병든 그 사람보다 내가 우선 더 기쁨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무연대비(無緣大悲)에서 일어나는 법 또한 향기일 것이다. 불보살은 이러한 안락 속 에서 항상 살고 있으며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 이 네 가지의 안락행을 수행의 요목으로 정하고 십 선(十善)의 정진법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대자대비를 일시라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법원주림(法苑珠林)이란 책에 보면 진심이 많은 중생에게는 자비관을 하라고 일러 놓았다. 성 내는 사람에게는 항상 자비심을 가지라는 뜻이다. 마음속에 언제든지 사랑을 간직하고 불쌍히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성을 낼 수가 없을 것이다.

또 천태라는 유명한 큰스님은 자는 아버지의 마음에 견주었고 비는 어머니의 마음에 부합시 켜 놓았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어머니는 자식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달게 받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다시한번 아버지와 어머니의 한없는 자비를 생각해야 될 것이다.

근래에 와서 망측한 외래풍조에 잘못 물이 든 젊은 층에서 부모의 깊은 은혜와 자비를 깨닫지 못하고 저희들 스스로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여 늙은 부모를 괄시하고 부모의 가르침을 도외시하는 망국적인 풍조가 보이는 것은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나 효자경을 읽어보라.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다는 것을 대강이라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나이 칠십이 넘어 아버지가 병이 들어 임종이 임박했을 때 사십이 넘은 아들이 그 곁에서 간호 를 하는데 아버지가 곧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러 겨우 눈짓으로 물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그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아들이 그릇을 들고 마당에 있는 우물에 물을 뜨러 가려고 하자 그 죽어가던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으면서 우물이 위험한 데 물을 뜨다가 실족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면서 조심하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부를 하더라는 것이다. 사십이 넘은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어린애같이 보였던 것이다. 자기 에게 금세 닥쳐오는 임종의 절박함도 잊어버리고 아들을 걱정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것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다.

부모의 마음은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는다. 내가 자식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자식들도 당연 히 보상할 것이라는 바람도 없으며 어릴 때 저희들을 젖먹여 길렀고 더러운 것을 씻어 주었 고 맑고 깨끗한 자리를 골라 뉘었으며 맛있는 것은 토해서라도 자식에게 먹여 키웠으니 늙은 다음에는 자식들의 부양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은 더구나 아니다. 그저 무한한 자비를 쏟았을 뿐이다.

불교는 인격을 고도로 완성시키는 것이기 때문 에 인격이 완성된 사람은 반드시 부모의 높은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 애써야 한다. 이것 이 곧 부처님의 사상이며 보살의 행원과 부합되는 것이다.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수행이 놀랍고 정진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결코 보살 도에 가까울 수 없으며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도 없다. 부모의 은혜와 자비를 모르는 사람이 어찌 불보살의 은혜와 광대무변한 자비를 알 수 있겠는가 말이다. 자비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포악무도한 하등동물에 지나지 않으며 허울 좋은 인간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이비 인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자비가 생명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도 자비가 생명이다.

『법화경 제품』에 보면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말해놓았다.

자비희사 네가지가 곧 ‘사무량심(四無量心)이다. 의자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며,비(悲)란 중생의 고통을 제거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희란 남이기뻐하는 것을 보고 같이 기뻐할 줄 아는 것이며,사란 멀고 가깝고 친하고 친하지 않은 것이 없이 누구에 게라도 평등한 상태를 말한다. 말이 쉬워 그렇지 내 한 몸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 어떤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분에 넘치는 욕심를 내기도 하고,말을 함부로 하기도 하고,갖은 죄업을 짓고 스정음 스님은 봉축법어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셋이 차별이 없다”라고 설파했다.있는 현실에서 항상 남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진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엄경』에 보면 아주비구라는 스님과 초계비구(草繫比丘)라는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아주비구는 법복을 입고 탁발하러 어느 집에 들어갔다. 그 집은 유리로 구슬을 만드는 집이었다.

아름다운 구슬을 만들어 마당에 넣어 두었는데 스님이 입은 붉은 가사가 구슬에 비쳐 구슬이 붉게 된 것을,집에서 기르던 오리가고기 덩어리인 줄 알고 집어삼켰던 것이다. 주인은 스님의 탁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구슬에만 집착되어 낱낱이 헤아려 한 개가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는 스님을 도둑으로 몰아 구타와 봉변을 무수하게 가했다. 그러나 스님은 오리가 집어삼켰다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만일 오리가 구슬을 삼켰다는 말을 했다가는 그 포악한 주인이 당장 오리를 죽일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생명을 보호하기위해 스스로 도둑의 누명을 쓰고 구타와 봉변까지 달게 받은것이다.

초계 스님은 어느 깊은 산길을 걸어 행각을 하던 중 갑자기 도둑떼가 나타나 스님의 소지품을 빼앗은 다음,숲속에 끌고 들어가 풀을 가지고 꽁 꽁 묶어 놓고 가버혔다. 스님은 힘을 써서 일어나 가도 될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풀이 끊어져 상할 것을 걱정하여 묶인 그대로 며칠을 지내다가 행인을 만나 곱게 풀을 풀고갔다. 이러한 것을 일러 자비라 한다.

또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보면 보현보살의 열 가지 원력 가운데 희덕(喜德)이란 말이 나온다. 보현보살은 자비의 대명사이다.

『화엄경」에서는 보현행원품이 가장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열가지 큰 원력 가운데에서도 이것이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은 육신이라는 이 거짓 나에게 사로잡혀 좁은 아상(我相)을 고집하고 모든 것을 나라는 여기에 중심을 두어 함부로 남을 무시하고 헐뜯고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고 헛된 명예를 욕심내고 시기와 질투 속에서 어둡고 어리석은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지만 보현보살은 일체중생을 기쁘게 해 줄 뿐 아니라 중생들이 기뻐하는 그것을 같이 기뻐할 줄 아는 커다란 자비심을 가 졌다.

불교의 수행목적은 보현보살과 같은 대자대비 가 흔들리지 않는 바탕이 되도록 하는데 그 참뜻이 있다. 자비가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육도를 성 취할 수 없으며 일체의 수행과 정진이 성취될 수 없다. 자비가 충만 않은 사람이 어찌 보시(布 施)행을 닦을 수 있으며 지계와 인욕(忍辱)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벌써 사십여 년 전이다. 우리나라 시인이며 또 한 무주상행(無住相行)의 일인자라 볼 수 있는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이 대구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한여름 복중에 한 번 찾아갔더니 게딱지 같은 초가집 컴컴한 작은 방에 아래위 할 것 없이 홀딱 벗고 앉아 있었다.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었더니 집에서 키우고 있던 고양이가 삼일 전에 죽었기에 오늘 공동묘지에 장사를 지내주고 오는 길인데 또 친구가 서울까지 가야 할 터인 데도 여비가 없다고 걱정하기에 단 한 벌밖에 없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저당 잡혀 그 돈을 친구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자기는 몸을 가릴 만한 옷이 없어 벗고 방에 들어앉아 있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면 그의 자비를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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